한 줄의 활자
A Line of Type!
‘한 줄의 활자’로 번역되는 이 문장은 구텐베르크 이후 현대의 인쇄 혁명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은 현대 인쇄 기술의 혁명을 이끈 라이노타입(Linotype)사의 역사를 엮어 낸 것으로 일종의 사사(社史)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은 라이노타입사에서 창사 120주년을 기념하여 홍보용으로 기획했던 것인데, 인쇄 기술의 발전사를 톡톡 튀는 일러스트레이션을 곁들여 재미있게 구성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알레시오 레오나르디, 얀 미덴도르프 저 / 윤선일 역
안그라픽스 / 2010.08.10
구텐베르크의 발명 이후, 400여 년에 걸쳐 인쇄기의 성능은 개선을 거듭하였고, 증기엔진으로 작동하게 된 이후에는 그야말로 기관차와 같은 속도로 인쇄물을 찍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에도 본질적으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작업 공정도 있었는데, 작은 낱활자를 한 글자씩 골라서 문장에 맞게(게다가 뒤집힌 상태로) 배치하는 조판 작업은 180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조판공들의 손놀림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숙련된 조판공이라 해도 사람의 손으로 활자들을 하나씩 뽑아서 배치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요구되었고, 이는 인쇄작업 전체의 생산성을 저해하는 주된 걸림돌이었다.
<조판과정은 활자들을 하나씩 뽑아서 배치하는 노동집약적 작업이다>
<책이나 신문을 출판하려면 이런 규모의 조판 설비와 인력을 필요로한다>
무지막지하게 노동집약적이고 소모적인 조판 작업을 자동화하기 위해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제대로 쓸만한 것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도들은 활자들을 인쇄할 내용에 맞게 자동으로 모았다가 인쇄가 끝나면 다시 원래 활자들이 있던 자리로 재분배하는, 말하자면 사람들의 작업방식을 그대로 기계화하는 시도들이었는데, 당시의 기술력으로 인간의 섬세한 움직임을 대체할 정교한 기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조판 과정을 자동화하는 최초의 쓸만한 기계는 1886년 7월, 독일 출신의 시계수리공 오트마 머겐탈러(Ottmar Mergenthaler, 1854~1899)에 의해 만들어졌다. 미국으로 건너온 오트마는 우연히 인쇄소에서 어이 없을 정도로 단순 반복적으로 조판작업을 하는 모습을 본 뒤 자동조판기 발명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다. 15년에 걸친 무수한 실패 끝에 만들어낸 최초의 조판기계는 단순히 활자들을 모아서 배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타자를 치듯이 글자를 입력하면 활자들을 찍어낼 수 있는 금형을 자동으로 배치하고, 그 틀에 납을 부어서 ‘한 줄의 활자’를 통채로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Illustrated by Alessio Leonardi
처음 한 줄의 활자를 만들어 냈을 때, 그것을 본 해럴드 트리뷴의 소유주 와이트로 레이드(Whitelaw Reid)는 “한 줄의 활자(a line of type)를 한번에 만들어 냈군.”이라며 감탄했다. 오트마는 ‘한 줄의 활자’라는 어감이 좋다며 자동조판기계의 이름을 라이노타입(Linotype)으로 정했다. 라이노타입기가 이뤄낸 혁신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어서, 에펠탑으로 유명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샘이 많기로 유명했던 토머스 에디슨 조차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최초의 라이노타입 조판기는 숙련된 조판공 4명의 몫을 대신할 수 있었고, 꾸준히 개선을 거듭하여 최종적으로 조판공 1만 6천여명의 몫을 해내기에 이른다. 1970년대까지 라이노타입은 인쇄를 위해 필수적인 조판 작업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수십 만대가 판매되며 전세계의 인쇄시장을 거의 석권하다시피 승승장구했다. 또한 기계의 성능 개선 못지 않게 아름다운 글자꼴의 보유도 중요하게 생각하여 수많은 폰트들을 개발하고, 여러 활자제작소들을 인수하며 풍부한 글자꼴 라이브러리를 구축해 갔다. 그렇게 라이노타입은 폭발적인 인쇄 시장의 성장과 문자 정보의 대중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발전해 갔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것. 1984년 매킨토시와 포스트 스크립트의 출현 이후,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그대로 인쇄할 수 있는 전자출판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라이노타입은 인쇄판 제작에 있어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고, 여러 차례 인수합병이 되는 등 험난한 길을 걷게 된다. 요즘의 경우로 비교하자면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필름 카메라의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 조판기계라는 주 사업영역의 철저한 상실을 경험한 라이노타입은 컨텐츠 부문으로 사업영역을 전환할 수 밖에 없었고, 보유한 글자꼴들을 디지털화하여 폰트 라이브러리 회사로 거듭 나게 된다. 현재 라이노타입은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로만 폰트 라이브러리를 보유한 회사로 우리가 지금 흔히 사용하는 헬베티카나 유니버스, 프루타이거, 옵티마, 타임즈 뉴로만 등의 폰트들이 모두 그 라이브러리 중의 하나다.
<라이노타입 사는 현재 세계 최대의 폰트 라이브러리 회사로 변모했다>
우연히도 최근에 라이노타입 조판기를 회상하는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었다. 아마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 받는 폰트인 헬베티카를 테마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HELVETICA by Gary Hustwit’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더글라스 윌슨(Douglas Wilson)이 제작/감독한 ‘Linotype: The Film’은 소셜 펀딩의 대표격인 킥스타터닷컴(kickstarter.com)에서 투자를 유치하여 제작되었고, 올해 1월 최종 편집본이 완성되어 뉴욕의 SVA(School of Visual Art) 극장에서 첫 상영되었다. 곧 DVD로 출시될 예정이라는데 어떤 내용들을 담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Linotype: The Film” Official Trailer from Linotype: The Film on Vimeo
재기 넘치는 활자 디자이너이자 이야기꾼인 알레시오 레오나르디와 타이포그라피 저술가인 얀 미덴도르프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은 라이노타입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인쇄와 타이포그라피 분야의 지나 온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장 자크 상뻬의 그림책을 보는 듯 위트 있는 손그림과 술술 읽히는 문장으로 현대 타이포그라피의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굳이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재미삼아 읽기에 무리가 없다. 물론 타이포그라피에 관심이 많은 디자이너들에겐 깨알같은 재미를 주는 에피소드들도 가득하다.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인쇄와 타이포그라피의 역사 속으로 가벼운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